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4 후퇴 (문단 편집) == 여담 == * 이 당시의 참상을 빗댄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가 크게 유행하여 국민의 애창곡이 되었다. 이 곡은 [[흥남 철수작전]]과 1.4 후퇴를 배경으로 한 곡이다. * 1.4 후퇴로 생겨난 피난민들이 가장 안전한 최후방 임시수도 부산으로 계속 몰려드는 바람에[* 사실 1.4 후퇴 이후 중국군은 경기 남부에서 저지 성공했기 때문에 피난을 가도 부산까지 내려갈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엔 어디까지 밀릴지 알 수 없었고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뒤통수 경험]]도 있으니 가능하면 최대한 멀리 피난가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다.], 1951년 3월 부산의 인구가 120만 명을 넘어서게 된다. 그리고 이들을 수용하기엔 비어있는 집과 땅이 부족했기 때문에 피난민들은 산자락 아무데나 [[판자집]]을 지었다. 예를 들면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생긴 [[아미동 비석마을]]. 1945년 광복으로 살아있는 일본인은 모두 떠나고 남은 일본 무덤들을 당연히 부산 토박이들은 그런 데서 살지 않았지만 피난민들은 몸을 뉘일 자리도 없다보니 비석을 뽑아다 계단을 만들고 집의 부재로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당연히 피난민들도 여기가 무덤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지만 이들이 훗날 회고하기를 '''귀신보다 배고픔과 집 없는 게 더 무서웠다고 한다.''' 이때는 부산부터 동래까지 거리, 골목 구석마다 사람이 빼곡히 차 있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정부는 전국 곳곳에 피난민 [[수용소]]를 만들어 피난민들을 수용하려 했으나 이도 역부족이었다. * 이 당시 피란민들은 가족 친지들에게 [[부산광역시|부산]] [[영도대교|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뿔뿔이 흩어졌는데, 이로 인해 오랫동안 영도대교 주변이 북적거렸다고 한다. 영도다리는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다리가 들어올려지는 도개교로 이미 일제 때부터 뉴스에서도 많이 나오고 해서 당시 외지인들도 잘 아는 부산의 랜드마크 하면 영도다리였기 때문에, 부산을 전혀 모르면서 일단 부산 방향으로 걸어가는 피난민들은 영도다리를 약속 장소로 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도다리 아래에는 [[점집]]골목이 형성되었는데, 피난민들이 막상 찾아오니 가족 친지를 찾을 수 없어서 헤어진 가족들의 생사를 알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점을 본 것이다. 지금은 일부 점집만 남아있다. * 윌리엄 R. 포르스첸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 <[[1초 후]]>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한 명인 돈 바버가 6.25 전쟁 당시 [[공군]] 비행기 조종사로 참전하여 1.4 후퇴를 경험했다. 당시 그는 서울 상공을 비행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작중에서 일어난 [[EMP|전자기 펄스 공격]] 이후 [[헬게이트]]가 열린 블랙마운틴 주변 도시의 상공을 비행하면서 목격한 상황들을 설명하면서 마치 1951년의 한반도 같았다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